
아카데미 9개 부문 노미네이트. 숫자만 보면 올해 가장 화제작이어야 할 영화인데, 막상 국내 극장가에선 조용히 묻히고 있습니다. 저는 개봉 첫 주에 보고 나서 어질어질한 채로 극장 밖을 나왔습니다. 탁구 영화인 줄 알았는데, 전혀 다른 것을 보고 왔다는 느낌이었습니다.
티모시 샬라메,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티모시 샬라메가 연기를 잘한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티 마우저를 보면서는 좀 달랐습니다. '경외감'이라는 표현이 처음으로 떠올랐습니다. 세상 찌질하고 오만불손한 캐릭터를 이렇게 자연스럽게 소화하는 배우가 있다는 게 솔직히 놀라웠습니다.
마티 마우저는 속사포처럼 대사를 퍼붓고, 타인의 감정 따위는 안중에도 없으며, 원하는 걸 얻기 위해 거짓말을 거리낌 없이 내뱉는 인물입니다. 비호감이라는 말이 부족할 정도인데, 묘하게 눈을 뗄 수가 없습니다. 이게 단순한 악인 연기가 아니라 '경이로울 정도의 목표의식'을 가진 인간의 민낯으로 보이기 시작하면, 어느 순간 응원까지 하게 됩니다.
특히 제가 인상 깊었던 건 엔도와의 마지막 경기 장면이었습니다. 그냥 자선 행사 성격의 경기인데 마티는 목숨 걸고 달려듭니다. 그리고 저는 속으로 '제발 록웰이 이걸 보고 감동받아서 마티를 돕는 뻔한 결말로 가지 않길' 바랐습니다. 그랬더니 록웰은 경기 도중 와서 악담과 저주를 퍼붓고 그냥 가버립니다. 이게 너무 좋았습니다. 현실은 그렇게 작동한다는 걸 감독도 알고 있었던 거겠죠.
아메리칸드림이라는 거짓 희망의 구조
영화의 배경은 2차 세계대전이 막 끝난 1950년대 미국입니다. 당시 미국 사회는 '아메리칸 드림(American Dream)'을 외치던 시절이었습니다. 여기서 아메리칸 드림이란, 출신이나 계층에 관계없이 누구든 성실하게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이상을 말합니다. 문제는 이 이상이 유대인과 흑인에게는 철저히 닫혀 있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당시 미국 사회는 유대인과 흑인의 대학 정원을 제한하고, 거주 구역과 직업까지 법적으로 제한하는 방식으로 계층 이동의 사다리를 걷어찼습니다(출처: History.com). 마티가 탁구 천재임에도 흑인과 유대인으로 구성된 비주류 공연팀 할렘 글로브 트로터스에서 서커스 같은 공연으로 생계를 연명해야 했던 건 재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 신분의 벽 때문이었습니다.
록웰 회장이 만년필 회사를 운영한다는 설정은 이 구조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만년필은 볼펜이 등장하고 나서도 사라지기는커녕 계약서 서명처럼 누군가의 운명을 쥐락펴락하는 권력의 도구로 자리 잡았습니다. 감독은 이 만년필을 '아무리 신진세력이 들어와도 절대 자리를 내주지 않겠다는 기득권의 저항'으로 사용하고, 그 대척점에 탁구와 마티를 배치했습니다. 탁구채를 잡는 방식인 '펜홀더(Penhold Grip)'—이는 마치 펜을 쥐듯 라켓을 잡는 그립 방식입니다—를 굳이 언급하면서, 만년필 회사 록웰이 탁구계까지 쥐락펴락할 수 있다는 언어유희를 심어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 마티의 성 '마우저(Mauser)' — 독일어로 '변화·탈바꿈'을 뜻하며, 동시에 독일 총기 브랜드 이름이기도 합니다. 신분을 바꾸려는 저항의식을 이름 안에 녹인 것입니다.
- 록웰이 자신을 "1601년부터 살아온 뱀파이어"라 표현한 것 — 1601년은 영국 동인도회사가 첫 항해를 떠난 해이자, 현대 자본주의 착취 시스템이 태동하던 시기입니다.
- 전범국 일본이 1952년 세계 대회에 참가한 배경 — 미국이 반공 파트너로 일본을 끌어들이기 위해 체결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1951)의 산물입니다.
탁구공으로 만드는 연출, 그리고 기네스 펠트로의 역할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관람객을 탁구공으로 만드는 영화'라는 표현이 자꾸 떠올랐습니다. 대사의 속사포 리듬, 음향, 시선 이동, 화면 레이아웃까지 영화 전체가 구조적으로 불편하게 설계되어 있습니다. 보는 내내 이리 튀고 저리 튀는 느낌이었고, 다 보고 나니 어질어질했습니다.
케이스톤 역할이 기네스 펠트로여야 했던 이유
케이스톤은 한물간 여배우, 록웰 회장의 트로피 와이프로 등장합니다. 마티는 기자들이 자신의 인터뷰를 끊고 케이스톤에게로 화제를 돌리는 순간, 그녀를 유혹해 백인 주류 사회의 상징을 찬탈하려는 계획을 세웁니다. 차별에 의해 짓밟힌 자존감을 회복하려는 비틀린 방식이었습니다.
이 역할에 한때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받고 2015년 이후 활동이 뜸해진 기네스 펠트로를 캐스팅한 것은 감독의 의도가 그대로 드러나는 지점입니다. 캐릭터와 배우의 실제 경력이 겹쳐지는 순간, 케이스톤의 공허함이 훨씬 입체적으로 느껴집니다. 마티가 탁구 경기에서 악착같이 승리를 쟁취하는 장면을 보고 케이스톤이 동질감을 느끼는 것도, 남편의 통제 아래 무대를 잃어버린 여배우가 자신의 옛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라 이해하면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그녀가 마티와의 관계를 끊지 못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마티의 날것의 에너지는 그녀가 자본가의 도구로 전락하며 포기했던 꿈을 다시 깨우는 유일한 통로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자신을 짓밟는 사람에게서 살아갈 이유를 찾는 이 기괴한 구도가, 저는 이 영화에서 가장 날카로운 장면 중 하나라고 느꼈습니다.
감독의 자화상, 수미상관 구조가 말하는 것
조쉬 사푸디 감독은 전작 <언컷 젬스>를 만들기까지 10년을 고초 속에 보냈다고 합니다. 투자 유치도, 주인공 캐스팅도, 업계의 조롱과 금전적 압박도 그를 끊임없이 짓눌렀습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완성해야 모든 걸 만회할 수 있다고 믿고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고 합니다. 마티 마우저가 일본행 비행기 표값을 벌기 위해 록웰 회장 앞에서 엉덩이까지 내놓는 장면, 승부조작에 가담할 뻔한 일화들, 이것들이 단순한 캐릭터 설정이 아니라 감독의 자전적 체험에서 나온 것임을 알고 나면 영화의 밀도가 달리 느껴집니다.
그리고 감독은 언컷 젬스 이후 무너진 내면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아이의 눈을 처음 본 순간을 말합니다. "무한한 시간의 루프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기분"이었다고요.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었다는 깨달음. 이 감정이 마티 슈프림의 시나리오가 됩니다.
'수미상관(首尾相關)'이란 작품의 시작과 끝을 동일하거나 유사한 장면·이미지로 연결해 주제를 강화하는 서사 기법입니다. 영화는 수억 마리의 정자가 난자를 향해 경쟁하는 장면으로 시작해, 마티가 자신의 아이를 처음 만나며 눈물 흘리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태어나기 위한 경쟁에서 이겼지만 삶이라는 또 다른 지독한 경쟁 속에서 살아온 마티가, 그 무한한 생명의 순환 앞에서 드디어 자신을 옥죄던 강박을 내려놓는 순간을 포착한 것입니다. 이 구조를 알고 보면 엔딩의 울림이 전혀 다르게 느껴집니다(출처: IMDb — Marty Supreme).
제 경우엔 영화가 끝나고 한동안 자리를 못 떴습니다. 탁구 전기 영화라고 생각하고 들어갔다가, 완전히 다른 장르의 무언가를 보고 나온 느낌이었습니다. 연출, 편집, BGM 모두 완벽했지만 그 어떤 요소보다 이 수미상관 구조가 가장 오래 남았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마티 슈프림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건가요?
A. 실존 탁구 선수 마티 라이스먼의 자서전 <더 머니 플레이어>를 모티브로 각색한 작품입니다. 다만 실제 마티 라이스먼은 영화 속 마티 마우저처럼 극단적인 만행을 저지르지는 않았습니다. 감독이 시대적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상당 부분을 창작하고 변형했기 때문에, 오해하지 않으시는 게 좋습니다.
Q. 영화에서 스폰지 라켓이 왜 그렇게 중요하게 다뤄지나요?
A. 당시 선수들은 하드 라켓에 맞는 공 소리로 스핀과 궤적을 예측했습니다. 스폰지 라켓은 이 소리를 완전히 흡수해버려 기존 선수들을 '귀머거리, 벙어리'로 만들었다고 실제 마티 라이스먼이 표현했을 만큼 충격적인 변화였습니다. 영화에서는 이 라켓을 들고 온 일본 선수 엔도를 통해 미국 자본주의가 이권을 위해 전범국 일본을 끌어들이는 아이러니를 함께 담아냈습니다.
Q. 록웰 회장 역할이 전문 배우가 아닌 이유가 있나요?
A. 감독이 의도적으로 미국 유명 창업 프로그램 샤크탱크의 진행자 케빈 오리어리를 캐스팅했습니다. 프로그램에서 냉혹한 자본 논리로 창업자들에게 독설을 퍼붓는 그의 실제 이미지를 그대로 활용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복장과 말투까지 프로그램 속 모습 그대로 연기해달라 요청했다고 합니다.
Q. 마티가 결국 일본 선수를 이기는 건가요?
A. 영화의 핵심은 승패 결과보다 마티가 왜 그 경기를 치르는지로 이동합니다. 록웰의 협박으로 아메리칸 드림이 자신을 가두던 거짓 희망이었다는 걸 깨달은 마티는, 성공을 위해서가 아니라 탁구 자체를 즐기기 위해 그 경기에 임합니다. 그 변화가 이 영화에서 진짜 승리의 의미입니다.
결론
저는 올해 상반기 개봉작 중 마티 슈프림이 가장 인상 깊었습니다. 탁구 전기 영화도 아니고, 성공 서사도 아니며, 주인공은 끝까지 비호감입니다. 그런데도 이 영화가 매력적인 이유는 그 모든 불편함이 철저하게 계산된 설계라는 걸 알게 되는 순간 느껴지는 쾌감 때문입니다.
아메리칸 드림, 수미상관 구조, 록웰의 자본주의 상징, 그리고 감독의 자화상까지 알고 보면 볼수록 층위가 쌓이는 영화입니다. 아직 보지 않으셨다면 미리 이 구조를 알고 들어가시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한 번 더 보고 싶어지는 몇 안 되는 작품이었습니다.